난 언제부터인가 “담임목사”라는 호칭을 참으로 싫어하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어느 교회 “담임목사님”이세요?하고 물으면 나는 “말씀 사역자”라고 정정을 한다.
내가 왜 이토록 “담임목사”라는 호칭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 동안 “담임목사”들이 누렸던 기득권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 때 “담임목사”로서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누렸던 자였다.
교회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기득권은 많아졌다.
친교시간이 되면 성도들은 담임목사에게 밥을 먼저 챙겨준다.
어디를 가도 늘 상석에 앉게 하고, 맛있는 식당이 있으면 담임목사를 대접하겠다고 비싼 돈을 들여 데려간다.
휴가를 가면 휴가비에 용돈을 찔러주고, 때가 되면 옷을 맞춰준다.
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어떤 담임목사들은 교회에서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자녀들의 교육비까지 받는 호사를 누린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호사라 할지라도, 누리다 보면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섬기기 보다 섬김을 받는 위치에 앉게 된다.
그러나 이제 교회 개척을 하면서 난 친교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노년들을 먼저 챙기게 한다.
친교 시간이 끝나면 그릇을 들고 먼저 부엌에 들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고, 청년들을 집으로 불러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준다.
어떤 모임이던지 누군가 상석에 앉으라 하면 이젠 내가 앉는 곳이 상석이니 개의치 말라고 한다.
일을 하면서 말씀 사역자로 섬기다 보니 때로 설교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때는 돈 벌 시간을 줄이면서 말씀 준비로 밤을 샌다.
전에는 사례를 받고 목회를 했지만, 이젠 나 스스로 일을 하며 목회를 감당한다.
비록 부족한 것들이 많이 있고, 어떤 “담임 목사”처럼 호사는 누리지 못하지만, 이젠 난 주님만 바라보며 “담임 목사”가 아닌, “말씀 사역자”로 복음을 외치며 살아가고 싶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누군가 나에게 어느 교회 “담임목사님”이세요?하고 물으면 나는 “말씀 사역자”라고 정정을 한다.
내가 왜 이토록 “담임목사”라는 호칭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 동안 “담임목사”들이 누렸던 기득권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 때 “담임목사”로서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누렸던 자였다.
교회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기득권은 많아졌다.
친교시간이 되면 성도들은 담임목사에게 밥을 먼저 챙겨준다.
어디를 가도 늘 상석에 앉게 하고, 맛있는 식당이 있으면 담임목사를 대접하겠다고 비싼 돈을 들여 데려간다.
휴가를 가면 휴가비에 용돈을 찔러주고, 때가 되면 옷을 맞춰준다.
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어떤 담임목사들은 교회에서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자녀들의 교육비까지 받는 호사를 누린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호사라 할지라도, 누리다 보면 기대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섬기기 보다 섬김을 받는 위치에 앉게 된다.
그러나 이제 교회 개척을 하면서 난 친교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노년들을 먼저 챙기게 한다.
친교 시간이 끝나면 그릇을 들고 먼저 부엌에 들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고, 청년들을 집으로 불러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준다.
어떤 모임이던지 누군가 상석에 앉으라 하면 이젠 내가 앉는 곳이 상석이니 개의치 말라고 한다.
일을 하면서 말씀 사역자로 섬기다 보니 때로 설교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때는 돈 벌 시간을 줄이면서 말씀 준비로 밤을 샌다.
전에는 사례를 받고 목회를 했지만, 이젠 나 스스로 일을 하며 목회를 감당한다.
비록 부족한 것들이 많이 있고, 어떤 “담임 목사”처럼 호사는 누리지 못하지만, 이젠 난 주님만 바라보며 “담임 목사”가 아닌, “말씀 사역자”로 복음을 외치며 살아가고 싶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