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이란 참 믿음을 갖는 순간 인간의 마음과 본성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한다고 해서 모두 다 똑같지는 않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름과 형식만 갖춘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듯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참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영국국교회의 신조에도 보면 "유형교회 안에는 항상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이 섞여 있다"라는 조항이 있다.
교회 안에는 '참 신앙을 결여한 사악한 자들'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선한 일을 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그분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공존한다.
세상에 마음을 바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사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죄를 의식하고 깊이 뉘우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넓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좁은 길을 가는 자가 복음의 그물에 잡힌 좋은 고기, 그리스도의 밭에서 거둔 좋은 알곡이라면 넓은 길을 가는 자는 나쁜 고기 그리고 가라지에 해당한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은 물론 세상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듭남의 가르침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와 상관없이 자명한 현실이다.
그러면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거듭남에 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머무르는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지 못했다.
마음의 변화가 모든 차이를 빚어낸다....
참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완전해서 '거듭남' 또는 '새 탄생'이라고 밖에 달리 적합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거듭남은 외형이나 육체의 변화가 아닌 속사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향과 본성이 전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의지와 취향은 물론, 죄와 세상과 성경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한마디로 의도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 새 사람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듭났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
거듭남을 경험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유아 시절에 거듭난다.
심지어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다.
물론 노년에 접어들어서 거듭남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장성한 후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장성한 후 거듭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나 빌립보의 간수와 같이 상당한 심적 고통을 동반하며 극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고, 또 고난이나 하나님의 비상 섭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로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선포되거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거듭남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우리가 읽고 쓰는 명칭이나 표현 또는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경험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알 수 있다. 바라건대 구원받은 사실에 충실하라.
쓸데없이 분란만 일으키는 논쟁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이상, 거듭남을 둘러싼 모든 논쟁과 다툼은 무의미하다.
거듭남은 참 그리스도인의 징표이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자아와 세상으로 향하는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을 자처한다고 해서 모두 다 똑같지는 않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름과 형식만 갖춘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듯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참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영국국교회의 신조에도 보면 "유형교회 안에는 항상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이 섞여 있다"라는 조항이 있다.
교회 안에는 '참 신앙을 결여한 사악한 자들'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선한 일을 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그분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공존한다.
세상에 마음을 바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사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죄를 의식하고 깊이 뉘우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넓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좁은 길을 가는 자가 복음의 그물에 잡힌 좋은 고기, 그리스도의 밭에서 거둔 좋은 알곡이라면 넓은 길을 가는 자는 나쁜 고기 그리고 가라지에 해당한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은 물론 세상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듭남의 가르침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와 상관없이 자명한 현실이다.
그러면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거듭남에 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머무르는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지 못했다.
마음의 변화가 모든 차이를 빚어낸다....
참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완전해서 '거듭남' 또는 '새 탄생'이라고 밖에 달리 적합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거듭남은 외형이나 육체의 변화가 아닌 속사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향과 본성이 전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의지와 취향은 물론, 죄와 세상과 성경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한마디로 의도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 새 사람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듭났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
거듭남을 경험하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유아 시절에 거듭난다.
심지어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다.
물론 노년에 접어들어서 거듭남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장성한 후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장성한 후 거듭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나 빌립보의 간수와 같이 상당한 심적 고통을 동반하며 극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고, 또 고난이나 하나님의 비상 섭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로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선포되거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거듭남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우리가 읽고 쓰는 명칭이나 표현 또는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경험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알 수 있다. 바라건대 구원받은 사실에 충실하라.
쓸데없이 분란만 일으키는 논쟁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이상, 거듭남을 둘러싼 모든 논쟁과 다툼은 무의미하다.
거듭남은 참 그리스도인의 징표이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자아와 세상으로 향하는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